[돛대샘] 2018 여태껏 우리가 몰랐던 비문학 이야기_5. 장자와 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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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부터 해야 하나?’ 머릿속이 복잡할 때 자주 떠오르는 생각이다. 필자는 학생들에게 종종 하는 조언이 있다. ‘주변을 잘 정리해 두도록’ 그것이 학습 환경의 가장 기본이라고 강조하곤 한다. 정작 자신은 그걸 잘 실천하지 못하면서 말이다. 이황의 ‘만보’라는 한시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잊음 많아 이 책 저 책 뽑아 놓고서 / 흩어진 걸 도로 다 정리하자니” 책상 위에 이 책 저 책이 뒹구는 것은 필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 차이점이 있다면 도로 다 정리하는 것인데, 역시 위대한 스승 이황에게 고개가 숙여지는 대목이다.
차라리 이와 같은 물리적인 정리라면 그래도 다행스럽다고 할 수도 있다. 어느 정도의 불편만 감수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정 아니면 하루 잡아 정리를 해도 되니 말이다. 정신이 뒤엉켜 혼잡해 지면 머리도 무거워지고 몸도 제 기능을 상실한다. ‘뭐부터 해야 하나?’에 혹이 하나 더 붙는다. ‘이 정도밖에 안 되나?’ 쓰라린 자책이 꼬리를 물고 따라와 아픈 곳을 콕콕 찌르는 듯하다. 부풀어 오른 풍선처럼 머리 안의 공간은 번뇌로 가득차게 된다. 한 번 읽은 부분을 보고 또 보며 무의미하게 반복한다. 어서 벗어나지 않으면 일에 진전이 없다.
이와 같은 현상은 비단 일상에만 통용되는 사항이 아니다. 비문학을 풀고 있는 순간에도 언제나 직면할 수 있는 상황이기도 하다. 시간은 빛의 속도로 흘러가고 있고 지문은 제자리에서 맴돌기만 할 수 있다. 거기다 자신에 대해 책망까지 하다보면 글의 내용과는 별개로 답답함이 연이은 한숨만 재촉할 수 있다. 이런 주변을 차분히 정리하고 나의 정신 상태를 온전히 회복하는 데 장자의 목소리가 도움이 될 수 있다.
<예1>
그렇다면 첫째 이야기에서는 온전하게 회복해야 할 ‘참된 자아’를 잊은 것이고 둘째 이야기에서는 세상을 기웃거리면서 시비를 따지려 드는 ‘편협한 자아’를 잊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참된 자아를 잊은 채 세상에 탐닉하는 식으로 자아와 세계가 관계를 맺게 되면 그 대상에 꼼짝없이 종속되어 괴로움이 증폭된다고 장자는 생각한다. 한편 편협한 자아를 잊었다는 것은 편견과 아집의 상태에서 벗어나 세계와 자유롭게 소통하는 합일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
<예1>은 2016년 6월 평가원 지문에 나오는 내용이다. 장자는 ‘나를 잊는다’, 즉 몰입에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고 말한다. 어떤 대상을 맹목적으로 쫓다보니 주변을 돌아보지 못했다면 이런 몰입은 ‘참된 자아’를 잊은 것에 해당된다고 보았다. 지문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도 이런 부작용을 불러올 수 있음이다. ‘왜 이렇게 이해가 되지 않나?’라는 생각은 오히려 더욱 그 지문에 나를 구속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얘기다. 반면에 또 하나의 몰입의 유형이 있는데, 이는 마음을 텅 비우는 태도다. 어떤 대상을 온전하게 받아들이기 위해 나 자신을 비운다는 의미이다.
어떻게 현실에서 이를 적용할 수 있다는 말인가? 생애를 논하는 대가들의 철학 속엔 무언가 그럴듯한 묘미가 있어 보이지만 필자처럼 실천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머릿속이 비워지지 않다 보니 새로운 내용을 받아들이기가 점점 어렵게 되고 두뇌는 방어 기제로 똘똘 뭉치게 되고 시간은 가는데 어떤 요령은 없나라고 기웃거리게 되니 말이다. <예1>의 마지막 부분이 자꾸 눈앞에 아른거린다. ‘나를 잊으면 세계와 소통할 수 있고 대상과 합일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으니 한번 믿어 보라는’ 말이.
<예2>
가끔씩 우리는 이렇게 평소와는 매우 다른 특별한 순간들을 맛본다. 평소에 중요하게 여겨지던 것들이 이때에는 철저히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오직 대상의 내재적인 미적 형식만이 관심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마음의 작동 방식을 가리키는 개념어가 ‘미적 무관심성’이다. 칸트가 이 개념의 대표적인 대변자인데, 그에 따르면 미적 무관심성이란 대상의 아름다움을 판정할 때 요구되는 순수하게 심미적인 심리 상태를 뜻한다. 즉 ‘X는 아름답다.’라고 판단할 때 우리의 관심은 오로지 X의 형식적 측면이 우리의 감수성에 쾌⦁불쾌를 주는지를 가리는 데 있으므로 ‘무관심적 관심’이다. 그리고 무언가를 실질적으로 얻거나 알고자 하는 모든 관심으로부터 자유로운 X의 존재 가치는 ‘목적 없는 합목적성’에 있다. |
<예2>는 2008년 9월 평가원 지문에 나오는 내용이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 혹자가 철학은 칸트에서 끝났다고 말할 정도로 그는 사상의 대가임에 틀림없다. 장자를 얘기하면서 칸트의 ‘미적 무관심성‘이 자꾸 상기되는 것은 명경지수와 같은 경지가 칸트의 이 개념 속에서도 감지되기 때문이다. 무관심성은 일체의 편견과 아집으로 보인다. 수용은 지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수용에 대해 인색해져 버린 시대의 요구는 대상이 지닌 미적인 모습마저 놓치게 된 게 아닌지 생각해 보게 만든다. 장자와 칸트가 말한 몰입이 비문학을 푸는 즐거운 열쇠 중의 하나가 되길 은근히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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