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u Roman. [69422] · MS 2004 · 쪽지

2016-07-28 23: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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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이 국민을 바꾸는 시대는 지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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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언론은 국민을 바꾸지 못한다. 국민이 언론을 바꾼다. 총선 이후 태세전환하는 주류 언론들을 보고 든 생각이다. 정치적 견해를 형성 전개하는 과정이 예전에 언론의 지평과 가족의 지성에 국한돼 있었다면 지금은 본인이 애용하는 커뮤니티의 성격과 SNS가 더 영향이 큰 듯하다. 


#2 20대 때, '언론'을 참 많이 읽었다. 정말 신문도 많이 봤고 주간지, 월간지도 많이 봤다. 한 때 일간지는 5개, 주간지는 7개 정도를 봤다. 시사저널, 시사in, 주간조선, 위클리경향 같은 메이저 주간지부터 시사오늘 따위의 마이너 주간지까지 구독했다. 마이너라 해서 읽을 가치가 없었던 건 아니다. 적절하게 상도동계 인사들의 인터뷰를 따고, 김영삼이 공격받을 때 김현철 인터뷰 기사도 유일하게 싣는 등 요긴했다. 


#3 월간지는 무조건 월간조선, 신동아를 봤다. 월간중앙도 사장님이 직접 신청해주셔서 정기구독했지만 여성지 느낌이었고 소위 '야마'를 잘 잡는 건 전술한 월간조선과 신동아였다. 그 외 경제지는 한겨레가 야심차게 발행했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중앙의 포브스, 동아비즈니스리뷰를 봤다. 과하게 트렌디한 포브스도 좋았지만 깊이의 측면에서 동아비즈니스리뷰는 조선의 위클리비즈를 심화버전이라 할 정도로 잘 정돈되어 있었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는 세계적 명성에 비해 번역이 엉망이라 몇 번 보고 구독을 끊었다. 


#4 그렇게 많이 읽으면서 읽을만한 것들을 추렸다. "사람은 그가 읽은 책으로 알 수 있다"는 경구를 조금 수정하면, "사람은 그가 읽는 신문으로 설명된다"고 말하고 싶다. 말은 신문이라 했지만 여기엔 주간지, 월간지, 기타 시사를 다루는 언론 모두가 포함된다. 누군가 조선일보를 읽으면서 시사in을 보고 동아비즈니스리뷰를 읽는다면 난 이 사람에 대해 좋은 선입관을 가질 것이다. 


#5 누군가 그가 읽는 언론들을 내게 펼쳐보였을 때 그것을 통해 그의 정치성향이 확실하게 보인다면 개인적으로는 좋게 평가하지 않을 것 같다. 언론을 읽는다는 건 나의 세계관, 가치관과 언론 사이의 끊임없는 긴장의 연속이 되어야 한다. 그 긴장의 끈을 놓으면 어느새 기계적 중립에 매몰돼 좌우 어느 극단의 경우에 가는 경우를 나는 너무 많이 봐 왔다.


#6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건, 요즘 읽을만한 언론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중앙일보는 온건하지만 칼을 갈자는 느낌이 강했는데 요즘은 그냥 잡탕이 된 느낌이다. 예를 들어, 회사와 다른 논조로 최근에 뜬 권석천 논설위원의 경우 예전과 달리 글에 힘이 들어가 있다. 논설위원의 펜끝은 누군가를 의식하지 않는 지점에서 날카로워지는데 조금 떴다는 걸 본인도 아는지 보이기위한 느낌이 강하다. 조선일보는 정보도 가장 많고, 편집의 구성과 기사의 밀도는 단연 돋보이지만 졸렬하다. 예를 들면 사설과 기사로 실컷 띄워주고 찬양하던 이가 부패를 저질렀을 때 그에 대한 일고의 자기성찰도 없는 식이다. 동아일보는 주말판을 보면 가끔 놀라울 정도로 '야마'를 잘 잡아서 독자의 호기심을 신랄하게 파헤친다. 그리고 몇몇 논설위원의 칼럼 정도, 그 뿐이다.


#7 한국일보는 존경하는 선생님이 사장으로 계시지만 사실 요즘에는 잘 읽지 않는다. 여느 때처럼 시끄러운 세상에서 이미 정론지를 각 언론들이 표방하는 마당에 중도에는 도통 눈이 가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일보의 장점은 일간지 중 정보전달에 그나마 가장 충실하다는 점인데 이게 동시에 단점이다. 신문지의 색깔도 다른데 사실 왜 달라야 하는 건지 의문이다. 한겨레는 요즘 그냥 패스한다. 이렇게 활자 하나하나에 독자를 가르치려는 속내가 뚝뚝 떨어지는 신문을 나는 도저히 읽어낼 자신이 없다.


#8 시사in은 주간지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언론이다. 그래서 주변에도 많이 권했고 군대에 있을 때도 주소를 바꿔서 정기구독했다. 그런데 그런 언론이 요즘 맛이 가고 있다. 사실 이 글을 쓰는 이유의 7할도 그 때문이다. 일간지는 사주, 광고, 전통 등 기존에 형성된 정론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알기에 '공명정대'하기 어려운 현실적 한계가 많다. 중앙일보 기자라고 삼성을 후두려까고 싶지 않겠는가? 그런데 시사in은 태생부터 그런 기업통제에 대한 몸부림에서 나온 집단이다. 이미 시사저널에서 체계적으로 트레이닝 받던 이들이 자본의 통제마저 덜 받게 되니 그야말로 제대로 펜대를 휘두를 수 있게 됐다. 그게 내가 읽은 2009~2011의 시사in이었다.


#9 하지만 팬덤이 생기고 이에 대해 감놔라 배놔라 하는 독자들이 많아졌는지 이들을 위한 기사가 많아졌다. 여기에 북한전문기자랍시고 관련 특종을 내는 한 기자의 기사를 유심히 보면 중립적으로 쓰는 듯해도 북한과 미국 중 나쁜 놈은 언제나 미국이다. 어느 기자는 데이터를 활용하여 기사를 내는데 초반엔 제법 참신했고 와닿았다. 그러나 이 기자 역시 결론에 데이터를 끼워맞추는 귀납적 추론에 결국 재미들렸는지 헤어나올 생각을 안 한다. 한때 중흥했다 몰락한 PD저널리즘의 퇴보를 그대로 답습하는 점이 안타깝다.


#10 가장 놀랐던 건, 시사in의 이번 호(제462호)를 보고나서였다.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를 다들 아는가? 일명 'THAAD'라 불리는 이 유도탄체계는 군사적, 과학적, 정치적, 외교적 쟁점이 집결된 아주아주 복잡한 사안이다. 그러니까, 시민으로서 이에 대해 정돈된 정치적 견해를 표명하기 위해서는 불행하게도 팩트를 수집하고 여러 관계자의 이야기를 듣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11 이걸 시민은 할 시간이 없으니 그 대신 언론을 치열하게 읽어야 한다. 신문에 나온 칼럼이랑 기사 몇 개 따위 읽고 "THAAD는 필요없는 거야, 혹은 필요한 거야"라고 말하는 건 말그대로 그냥아는 척이다. 왜냐하면 여기에도 "THAAD는 필요하지만 성주에의 일방 배치는 잘못된 거야"라는 각양각색의 의견들이 가지치고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12 그러나 모든 언론들이 이미 한 쪽 결론을 정해놓고 'THAAD'에 대하여 기사를 내고 칼럼을 내며 독자를 '가르칠' 때 나는 적어도 시사in은 조금은 균형잡힌 이야기를 해주길 바랐다. 그런데 웬걸, 비판기사, 성주군민의 의견, 결국 THAAD 배치의 최후승자는 북한일지 모른다는 전술한 그 기자의 기사, X밴드레이더가 배치된 일본 마을에서 레이더를 반대하는 시민단체의 사무총장, 마찬가지로 반대하는 일본시민, 그걸 명나라의 모문룡으로까지 유비해내는 데 성공한 어느 칼럼니스트(난 정말이지 이 글을 보고 기가 찼다.)까지 주르륵 내보냈다. 의문을 넘어 화가 났다.


#13 언론의 미덕은 정보 전달이고, 여기에 약간의 설득이 가미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정보 전달과 설득의 미학이 펼쳐진다. 설득을 넘어 설교로 가면 맞는 말이어도 돌아선다. 몇 해 전 유행했던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떠올려보자. 그 책이 인기 있었던 이유는 이명박 정부의 실정에 실망했던 이들이 '정의'라는 키워드에 과민하게 반응했던 탓도 있지만 샌델의 화법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누구보다 확고한 답을 갖고 있으면서 절대 자신의 의견을 발설하지 않는다. 


#14 끊임없이 정보를 전달하고, 생각해볼 여지를 준다. "너가 전철 운전기사인데 그대로 터널을 지나가면 터널위에 쓰러진 1명이 크게 다치고, 브레이크를 밟으면 다른 곳에 있는 5명이 죽는 대신 넌 책임을 면한다. 어떤 선택을 할래?" 이런 식이다. 그리고 책 말미에 자신의 의견을 아주 슬쩍 걸친다. 이러니 독자는 충분히 숙고할 시간을 갖게 되고 꽤 성공적인 자기객관화를 하게 될 수밖에 없다.


#15 다시 문제로 돌아오자. 결론적으로 시사in의 THAAD 보도는 객관적이지도 못했고 구성부터 글러먹었다. 어느 개도국에서 고속도로 건설 건으로 찬반대립이 팽팽한데 다른 나라에서 고속도로 건설하다가 죽은 노동자의 가족 혹은 합당한 보상을 못 받아 끝까지 반대하는 사람 인터뷰하는 건, 독자를 우습게 보는 것이다. THAAD 배치에 관한 여론조사는 새누리당, 민주당, 국민의당 모두 과반이 찬성하는 것으로 나온다. 


#16 오늘 언론인, 사립학교 교원이 포함된 김영란법이 통과됐다. 법을 공부하는 입장에서 참담하다. 사회생활 한 번 안 해본 이들이 법정에 올라 헌법연구관들이랍시고 써주는 서류 적당히 검토하고 결정을 하면 벌어지는 일이다. 그들은 아마 언론을 치열하게 읽지 않을 것이다. 김영란 법에 의하면 언론인, 사립학교 교원은 3만원을 넘는 식사를 대접받으면 처벌받는데, 사회상규에 위배되지 않는 행위는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사회상규의 의미는 대법원의 축적된 판례를 보고 알 수 있기에 모호하지 않다고 했다. 당장 길가는 재판관 한 명 붙잡고 물어보고 싶다. 한 100가지 케이스를 주면서 무엇이 사회상규에 위배되고 아닌 행위인지. 모두의 의견이 다를 것이다.


#17 여러 단락을 동원해 몇몇 언론을 까댔지만 내가 위에서 언급한 언론들은 실은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언론들 중 내가 애정을 갖고 봐왔던 언론들이다. 언론이 도와주어야 나같이 돌아다닐 시간이 없는 시민도 정보를 얻고 그에 대한 정치적 견해를 형성하여 사회를 바라보는 틀을 구성할 수 있다. 상황은 녹록지 않다. 기자 대신 '기레기'란 말이 정형화되고, 기자협회가 지적했듯 김영란법으로 언론인의 자기검열은 더욱 심화될 것이다. 그래도, 계속 달려주었으면 한다. 그래야 나처럼 검소한 이도 굳이 카드대신 현금을 꺼내 가판대에서, 서점에서 계속해서 사치를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18 끝으로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멘트를 인용하고자 한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부모님에게, 학교의 선생님에게 “한 쪽으로 치우치지 마라”, “항상 중용을 취하라”고 교육받는다. 그러나 그 잘난 중용, 균형이란 것을 잘못 취하다 보면, ‘한쪽으로 치우치지 마라’고 주의 받던 바로 그 극단에 가 있는 수가 있다. 10의 중간은 5의 언저리이고 1000의 중간은 500의 언저리이겠지만 이런 ‘기계적 중립’에 대한 천착이 그 사람을 시대착오적인 위치로 만드는 경우를 우리는 많이 보았다. 그런데, 튀어나온 못, 극단에 서 있는 인물이 되고 싶은 이가 어디 있겠는가? 난 언제나 사안을 객관적으로 냉철하게 조망하여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는 ‘중용의 사람’이고 싶을 뿐이다. 


#19 그리고 그러한 ‘중용’, ‘중립’에 대한 집착은 나의 무지를 드러나지 않게 할뿐더러 때로는 원만한 인격의 소유자로 만들기까지 한다. 그런 유혹을 깨고 싶게끔 하는 여러 좌우지점의 언론들이 제대로 칼을 휘두를수록 칼끝은 점점 견고해질 것이다. 중용의 본질은 기계적 균형이 아니라 칼끝 위의 균형이다.


                                                                  2016. 0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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