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김동욱 쌤 강의에서 양귀자의 ‘녹’을 다뤘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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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어느날 갑자기 광고 사원이 되어 거리로 나서게 된 것은 순전히 학보사 동료였던 친구녀석의 권유 탓이었다. 녀석은 그의 가슴 밑바닥에 앙금처럼 괴어있던 작은 소망 하나를 눈여겨 보아두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자신이 일하고 있는 여성 잡지의 편집부에 자리가 하나비어있으니 기왕이면 공모를 통해 입사해서 훗날을 기약해보자는 이야기였다. 바꾸어말하면시험은 형식적인 것으로 여성지쪽의 발령은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으니 몇 년 잡지에서 일하다가 신문쪽으로 올라갈 수도 있잖겠느냐는 유혹이었는데 기자가 되고 싶다는 지난날의 꿈이 돌연 수런수런 깨어 일어날만큼 그것은 적잖이 강렬했다.
영어니 논문이니 상식 따위의 답안지 메우는 것도 그닥 어렵지는않았다. 그리고 정해진 대로 합격에다가 이내 수습 코스를 밟으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는 당연히 기왕의 직장에 사표를내었다 ⓐ이 경우 사표라는 말이 풍겨주는 비극적인 긴장감은 하나도 없었다.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막판에 말야 꼭 끼워 넣어야할 작자가 나선 모양이야. 그래서 말이지 ⓑ자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우선 광고국으로 발령을 낸 것 같은데 당분간만 광고국에서 일하면 금명간에 꼭 구제가 있을거라네……. 출근을 시작한 첫 날 친구가 더듬더듬 뱉어 놓은 말이었다. 온갖 좋은 말로 두루뭉실 포장을 해보았자 내용물은 단 하나로 분명한 거절이었다. 이필웅 너는 기자가 될 수 없다. 그는 이 확실한 거부를 받아들고서 잠시 말을 잃었다.
그때 그는 어떤 놀이를 생각하고 있었다. 둥그런 원을 그려놓고 육십명이 넘는 아이들이 원속에 오글거리고 모여 서있었다. 챙이 긴 모자와 호각을 문 남자는 아마 담임 선생님이었을것이다. 시골 초등학교의 체육 시간, 그 역시 물들인 검정 무명 반바지에 러닝셔츠로 체육복을 대신하고서 아이들 사이에 끼여 선생님이 불어 제칠 호각을 기다렸다.
첫 번째 호각이 울리면 준비 동작으로 왼쪽 발을 잡아당겨 손으로 떠받치고 한 발로만 버팅기고 서야했다. 이어 두 번째 호각이 울리면 한쪽발로만 껑충껑충 뛰어다니며 아이들을 금밖으로 쫓아내야하는 닭싸움 같은 것이 시작되었다.
쨍쨍한 볕살과 푸석이던 흙먼지, 돌진해오는 까까중 머리의 급우에 떠밀려서 그는 순식간에 금밖으로 나동그라진다. 죽었다 라고 외치는 아이들의 함성 소리와 함께 그는 땅바닥에 나동그라진 채 죽음같은 어둠속으로 기어 들어가기 위해 눈을 감는다. 깨진 무릎은 얼얼거리고 모래 먼지는 매캐했다. 연속적으로 터지는 함성 소리. 죽었다, 죽었다……. 눈을 떠보니 ⓒ아직껏 살아남아 아등바등 급우들을 치미는 몇 몇 용감한 수탉들의 검정 고무신이 허공속에서 빙빙 맴을 돌고 있었다
……<중략……
여사원이 내놓은 커피의 맛은 밍밍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어느새 이만큼의 커피 중독인가라는 느낌에 다소 놀랐다. 지겨운데 그것 참 또야,를 연발하면서도 무수히 마시는 ㉠커피였다. 살다보면 알게 모르게 삶의 여러 대상들에 길들여지는 법이었다. 때로 더러움도 타고 단단히 배어버린 거짓의 냄새까지 살아 숨쉬기 위해서는 어쩔 수없다 하더라도 참 쓸쓸하다는 기분이었다. 여기에 앉아서 신문이나 뒤적거리며 고객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자신의 모습을내려다 보면서 그는 쓰게 웃었다. 값비싼 양복에 외국 상표의 넥타이를 걸치고 광고를 파는 사내. 그 사내의 양복 웃저고리의 안 포켓을 들여다 보면 각종 크레디트 카드와 빳빳한 현찰도 아쉽지 않을 만큼 넣어져 있었다. 아이들 옷은 남대문에서 자신의 옷은 동대문에서 고르는 아내지만 그가 입성만으로도 이만큼 호사하는 것에 관한 한 너그럽기 짝이 없었다. 하는 수 있나요. 직업이 직업이니 만큼 아내는 승용차가 첫 번째 필수품인 남편의 직업에 대해 불만을 표시한 적이 없었다. 불만은 커녕 아내는 앞집의 여자에게 이렇게 말하며 미소 짓기도 한다.
ⓓ우리 애 아빠는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과만 상대하는 게 일이에요. 네, 아 어디 나가느냐구요. 신문사랍니다.
신문사라니 이제와서는 신문 기자가 되리라는 기대 따위는 한번도 품은 적이 없었다. 한번 금 밖으로 밀려난 자에게는 금 안에 있는 것을 넘보지 않는 것만이 유일한 살길임을 그는잘 알고 있었다. 그를 유혹했던 친구 녀석은 금 안에서 승승장구하여 얼마전 일간지로 옮겨 앉았다. 눈코뜰 사이 없이 바쁘다는 비명이나 가끔 들려줄 뿐, 그의 사정을 애써 모른체하는 그를 원망하는 마음도 전연 품고 있지 않았다. 친구 녀석의 말대로 그는 펜 장수이고 자신은 꽃 장수일 뿐이었다. ⓔ펜대 굴려먹고 사는 펜장수와 현대 사회의 꽃이라는 광고를 팔러다니는 꽃장수는 어차피 한 좌판에 벌여 놓을 동류의 상품을 갖고 있지 못한 터였다.
꽃장수라는 호칭을 생각할 때마다 그는 동시에 스테인리스를 떠올리곤 하였다. 인간이 드디어 녹에서 해방되는 것을 의미하던 혁신적인 금속으로서의 스테인리스 말이다. 녹슬지 않고 흠없이 깨끗한 것을 원하던 식기류에 그것이 처음 등장하던 무렵 어머니는 맨 먼저 아버지 것과 그의 몫으로 두 벌의 주발을 들여놓고 한없이 대견해 했었다. 놋그릇도 양재기도 이 도도한 합금속의 차갑고 견고한 광택을 따라올 수는 없었다. 목단꽃보다 더 이쁘쟈. 어머니는 그것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표현하곤 했었다.
하지만 스테인리스에도 녹이 슨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물기를 건사하는 일에 조금만 게으르면 그릇에도 숟가락에도 수도 꼭지에도 어김없이 녹은 돋아났다. 잠시를 방심할 수 없을 만큼 그의 녹닦는 작업이 계속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그가 차를 몰고 이 거리에서 저 거리로 헤매는 동안에도 ㉡녹은 은밀하게 살을 꿰뚫으며 자라난다. 그가 밥을 먹는 사이에도 하루의 지친 몸을 눕히고 잠들어 있는 사이에도 도처에 널려있는 쇠붙이들은 공기를 받아 마시며 조금씩 조금씩 흉측한 더러움을 자신의 몸 위로 내어 미는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녹에 대해서 알고 있지 못하였다. 아니 무관심하였다고 말하는 게옳으리라. 처음 이사왔을 때 이미 수도 꼭지 마다에 붉은 녹이 슬어있기는 하였다. 문짝마다에 달린 손잡이도 마찬가지였다. 집안 구석구석에서 특유의 알싸한 녹냄새가 풍겨 온다고 깨닫기 시작한 것은 그러고도 얼마간의 세월이 흐른 뒤였다. 목단꽃보다 더 아름다워야 할 스테인리스의 어이없는 배신에 대해 그는 여태도 용납할 수가 없었다. 강철이나 청동의 녹을 닦는 일이라면 이처럼 허망하지는 않으리라. 그는 점차 많은 시간을 소비하기 시작했고 더욱 더다양한 방법을 동원하여 그것들과 씨름하였다.
참…..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뭔가 우리네의 현실, 엄마아빠가 우리 먹여살리려고 거쳐왔던 세상을 보여주는것 같아서 마음이 그렇네요…
이너서클 이런 것도 그렇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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