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준한전진 [531562] · MS 2014 · 쪽지

2015-01-25 23:24:38
조회수 16,482

2015학년도 수능 사회탐구 한국사 고난도 문제 기출해설

게시글 주소: https://iu.orbi.kr/0005571931

2015학년도 수능은 6월, 9월 모의평가에 비해서 상당히 높은 난이도로 출제되었습니다.
나름 역덕(?) 이라고 자부하면서 실제 시험장에서 풀어 본 저로서도 당황스러울 만큼 어려웠습니다.
과거 국사 문제가 전근대사에서 밑도 끝도 없이 들어갔다면, 이번 수능에서는 전근대+근현대 모두 상당한 함정 문제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역사적인 지식과 추론 능력을 상당량 요구하는 문제들이 많았습니다.


'전근대 5문제는 쉽게 나온다' 고 많은 선생님들께서 강조하셨습니다만, 이 문제는 시대별 지도와 각국의 수도를 모두 꿰고 있지 않으면 상당히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특히 후삼국 시대의 도읍을 내는 경우는 많이 없었습니다. 13수능 기출인 고려의 국경선 변화보다도 조금 더 어려운 난이도의 문제인 듯 합니다.

지도는 후삼국 시대이며, 이는 나주 부분이 후고구려(고려)의 월경지로 들어가 있다는 점에서 알 수 있습니다. 고려가 나주와 그 인근을 차지하면서 후백제를 압박했고, 견훤이 이쪽으로 망명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지도에 등장한 국가들이 후고구려, 후백제, 신라라는 것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신라는 천년 동안 천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 가 금성 (경주) 이라는 것은 쉽게 파악할 수 있으나, 후고구려(고려)는 철원으로 천도한 적이 있기 때문에 헷갈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도상 (가) 의 위치가 철원일 수는 없고, 당연히 초기 도읍이였고 왕건이 다시 환도했던 개경 (개성) 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나) 는 후백제의 수도인 완산주 (전주) 입니다.

여기까지 알고 들어가도 선지를 읽어내는 것이 상당히 헷갈립니다. 생소한 내용도 다소 섞여 있는 데다, 모든 선지가 가리키는 곳이 지도만 보고 푼다면 비슷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후삼국 시대의 도읍이라는 단서가 중요합니다.

①대성 학교가 세워진 곳은 평양인데, 평양과 개성은 지도만 볼 때는 헷갈리기 쉽습니다. 
②무신 집권기에 망이와 망소이의 난이 일어난 곳은 공주 명학소입니다.
③백제 성왕이 새 수도로 삼아 중흥을 도모한 곳은 사비성 (부여) 입니다.
④고려 전기의 3경은 개경, 서경 (평양), 동경이며 여기서의 동경은 전(前) 왕조 신라의 수도 경주입니다. 이후 남경 길지설에 의해서 고려 후기의 3경은 개경, 서경, 남경 (한양) 으로 바뀌게 됩니다.
⑤염포는 3포 (부산포, 내이포, 염포) 의 하나로서 지금의 울산입니다. 지도상의 위치는 역시 상당히 비슷합니다. KTX에서 신경주역 다음이 울산역이죠.

특히 ④번을 정답으로 골라내기 위해서는 고려 전기의 3경과 후기의 3경이 다르다는 것을 반드시 알고 있어야 했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 시험장에서도 상당히 헷갈렸던 문제입니다.


근대사에서 상당히 손대기 어려웠던 문제입니다. 경복궁을 분명 중건했는데, 갑신정변 때 보면 개화파들이 고종을 경우궁으로 데려갔다가 다시 명성왕후의 요청으로 창덕궁으로 들어갑니다. 아관파천 이후 고종은 외국 공사관들과 가까운 덕수궁으로 환궁하게 됩니다. 일단 이 정도가 이 문제에서 필요한 사전 지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①번은 제2차 갑오개혁 - '고종이 종묘에 독립 서고문을 바치고 홍범 14조를 반포했다'
⑤번은 독립 협회 - '독립 협회가 종로에서 만민 공동회를 열었다'

라는 식으로 개념서에 직접 주어지는 부분이니 문제 없이 지울 수 있습니다.

②번은 청일 전쟁이 아닌 갑신정변 때의 상황이라는 게 중요합니다. 당시 개화파들을 호위하던 일본군이 청군이 공격하자 철수하게 됩니다. 명성왕후가 창덕궁으로 가자고 한 게 받아들여졌으니 장소는 당연히 창덕궁입니다. 청과 일본이 싸웠다고 청일 전쟁이 아닙니다.

③번은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시위와 관련지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경복궁을 점령했다면 그 이유는 당시 고종 부부가 거기 있었기 때문에 경복궁이 정치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겠죠. 경복궁 점령 시위와 을미사변은 불과 1년 차이밖에 나지 않고, 그 사이 환궁을 해야 할 사건은 없다고 봐야겠죠. 을미사변의 정확한 장소를 알지 못하면 혼동의 여지가 있습니다.

④번은 '고종이 덕수궁으로 환궁했다' 는 것을 알고 있다면 오히려 낚시에 걸리기 쉽습니다. 고종이 황제 즉위를 하기 위해서 필수요소인 원구단 (환구단) 과 황궁우를 건설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위치에 대해서는 잘 배우지 않아서 환궁에 대해 좀 아는 학생들은 덕수궁에 있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일부 역사 선생님들께서 '지금은 남아있지 않고 호텔이 지어졌다' 는 후일담을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실제 환구단이 있었던 자리는 덕수궁 맞은편에서 좀 남쪽으로 내려간 을지로 쪽이며, 현재 이곳에 웨스틴 조선호텔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③번과 ④번이 상당히 혼동의 여지가 있었던 문제입니다. 정답은 ④.


'김원봉' 을 키워드로 잡으면 '본교' 가 '조선 혁명 간부 학교' 라는 것을 유추해내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의열단의 노선 변화와 함께 짚어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의열단은 1920년대에는 '민중 직접 폭력 혁명' 을 모토로 잡고 개개인별 투쟁과 의거에 치중했었죠. 하지만 1930년대 이러한 노선을 전격적으로 전환하여 단원들이 황푸 군관 학교에 들어가고, 중국 국민당의 지원으로 조선 혁명 간부 학교를 설립하는 단계까지 오게 됩니다. 여기서 의열단의 지난 행적을 언급한 ④번 선지를 지울 수 있습니다. 20년도의 청산리 전투를 언급한 ①번 선지 역시 지울 수 있겠죠.

김원봉은 이후 민족 혁명당(35)에도 참여하게 되며, 조선 의용대(38) 을 창설하게 됩니다. 조선 의용대와 민족 혁명당은 40년대에 전격적으로 임시 정부에 합류하게 됩니다. 그래서 김원봉의 이후 행적을 언급한 ③, ⑤번 선지도 지울 수 있습니다.

쌍성보 전투(32)의 연도와 조선 혁명 간부 학교(32) 의 설립 연도를 몰라도 김원봉과 의열단의 앞 뒤 흐름만 잘 파악한다면 풀 수 있는 문제입니다. 정답은 ②.


40년대의 민족 말살 정책임을 쉽게 파악할 수 있지만, 신문지법과 혼동할 여지가 있어서 풀이하게 되었습니다. 우선 신문지법을 만든 건 '통감부' 입니다. '총독부' 가 아니죠. 그리고 OO일보사가 과거 20여 년 동안 발행되었다는 것도 힌트입니다. 애국 계몽 운동기 신문들 중 20여 년 동안 발행된 신문은... 친일 기관지로 마개조 당하지 않는 이상 없겠죠. (친일 기관지면 폐간시킬 이유도 없겠죠.) 20년대 발행되었다 40년대 폐간 조치된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을 떠올리는 것이 타당합니다. ①번 선지는 반드시 지우셨어야 합니다.

①은 통감부 시기, ②/④는 무단 통치기, ③은 이른바 문화 통치기의 일이죠. ⑤가 민족 말살 통치기의 일입니다. 정답은 ⑤.



'유신 체제' 를 키워드로 잡으시면 낚이실 수 있습니다. '유신 헌법 체제' 는 10.26 사태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암살당한 이후에도 계속 이루어집니다. 제주를 제외한 전국의 비상계엄은 10.26 사태 이후 지속되고 있었고, 이후 5.17 쿠데타로 전국으로 비상계엄이 확대되며 계엄사령군 전두환이 전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이 글이 쓰여진 시점은 10.26 사태 이후 6개월 정도 후이니, 1980년 4월~5월 17일 이전 정도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일단 10.26 사태 이후란 점에서 박정희 대통령 시기인 ②번 선지는 아웃입니다.

①번의 국가 보위 비상 대책 위원회는 1980년에 등장하지만, 5.18 진압 이후 꾸려지게 됩니다.
③번의 5.18 민주화 운동은 전국으로 비상계엄이 확대된 이후에 일어나기 때문에 일치하지 않습니다.
⑤번의 '호헌 철폐' 와 '직선제 개헌' 은 1987년의 6월 항쟁에서 등장하는 구호입니다.

④번의 신군부 세력은 10.26 사태 이후 12.12 사태로 군을 장악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5.17 쿠데타로 권력을 잡게 됩니다. 그래서 제시된 시점과 맞아떨어집니다. 정답은 ④번.

⑤번 선지를 제외한 모든 선지가 1979년~1980년에 위치해 있다는 점에서 평가원이 작정하고 낸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두 가지 잡고 들어가야 합니다. '마이너스 성장'(79,97), '수출 100억 달러'(77). 1970년대 말로 시기를 확정하기 위해서반드시 필요한 두 가지입니다. '마이너스 성장' 만 잡는다면 1997년 IMF로 착각하여 ④번 선지를 고를 수 있으니까요.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 한 해가 2차 오일 쇼크가 터진 1979년이므로, (가) 는 대략적으로 1974년~1978년 사이입니다.

①번의 기술 집약형 산업은 1990년대 이후에야 발전하게 됩니다. 삼성전자는 이건희 시대부터 본격적으로 반도체 산업이 돌아갔으니...
③번에서의 3저 호황은 80년대 (86~88) 죠. 헷갈리면 안 됩니다.
⑤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은 전두환 정부 때에 시작되었고, 우루과이 라운드 타결은 김영삼 정부 때의 일이죠. 쌀개방을 20년 뒤로 미뤄서 박근혜정부 때에야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어느 쪽이든 저 시기하고는 관련 없습니다.

②번은 1970년대 중화학 공업의 발전에서 나타난 부작용이므로, 적절한 선지입니다. 정답 ②번.

이번 한국사 시험, 정말 어려웠습니다. 고난도 문제에서는 충분한 사전 지식과 적절한 추론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 역사 문제에서 흐름 파악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는 것을 말해드리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0 XDK (+0)

  1. 유익한 글을 읽었다면 작성자에게 XDK를 선물하세요.


  • 첫번째 댓글의 주인공이 되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