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군 [341438] · MS 2010 · 쪽지

2015-01-19 22:20:23
조회수 3,842

김돌님의 글에 근현대사 관련 부분을 보강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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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韓)의학은 원래 한(漢)의학이다?
: 1986년에 대한한의사협회에서 기존의 漢醫學이라는 명칭을 韓醫學으로 변경한 것 자체는 사실입니다.이것을 근거로 이 이전까지는 한국 한의학만의 고유성을 대중들이 인식하고 있지 않다가, 86년도를 기점으로 달라진 것으로 말씀하셨던 분들이 이번만은 아니었기에 오히려 좋은 기회가 주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우선은 漢醫學이라는 용어부터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19세기 말-20세기 초 조선에 서양의학이 전래되기 이전에 우리의 조상들은 우리가 현재 韓醫學이라고 부르는 이 전통의학을 어떤 명칭을 불렀을까요? 그냥 醫學입니다. ‘醫’라는 문자 자체가 동양의학 그 자체를 의미하는 문자입니다. 일본을 포함한 동북아시아의 의학의 뿌리는 중국이었고 삼국의 의학이 기본 자체는 공유하는 편이기에 醫學이라는 글자를 통해서 의료행위 혹은 학문 전반을 표현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에 중국의 전통의학과 한국의 전통의학이 기본 바탕은 비슷하지만 병을 바라보는 관점이나 처방되는 약 등에서 유의미한 차이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기에 다른 나라와 구분하고자 하는 개념 역시 존재했습니다. 한의학에 관심이 없는 분들도 잘 알고 계신 동의보감이라는 책의 이름에서 사용된 東醫라는 표현을 통해서 잘 알 수 있는 것이죠. 1986년 이전에도 우리 민족은 다른 나라와 우리의 의학이 다르다는 것을 일찍이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漢醫學이라는 용어는 일본이 조선을 강제로 병합하는 과정에서 서양의학과 기존의 동양의학을 구분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용어일 뿐이고, 이것을 1986년에 뒤늦게나마 청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정리하자면 무리한 용어 변경으로 대중들을 속이려고 한 것이 아니라, 잘못된 용어를 수정한 것일 뿐임.

-한의학은 일제의 잔재다?
: 한국 근현대사에 관한 무지가 낳은 안타까운 발언입니다. 이런 말을 한국인이 했다는 것이 조금 안타까운데요. 1910년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제로 병합하기 이전의 의료상황을 이해해봅시다. 이 땅에 서양의학이 본격적으로 전래되기 시작한 것은 1876년 일본과의 병자수호조약(강화도조약)이 체결된 이후입니다. 물론 영조시절에도 청나라와의 교류를 통해서 서양의학 서적등이 번역되어 소개된 적은 있지만 널리 퍼지진 못했습니다. 1877년 11월, 일제는 부산에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제생의원을 시작으로 원산의 생생병원, 인천의 일본병원 등을 설치하여 이 땅에 본격적으로 서양의학을 전파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이런 상황에서 당시 대한제국 정부는 서양의학과 한의학에 대해서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었을까요? 우선은 1900년 1월 4일에 새로 정립된 의사규칙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의사규칙에서는 "의사는 의학을 관숙(慣熟)하야 천지운기와 맥후진찰 과 내외경과 대소방과 약품온량과 침구보사를 통하야 대증투제(對症投劑)한 자를 云 함" 이라는 표현(의사규칙 제1조)과 "의사는 의과대학과 약학과의 졸업증서가 有하며 내부시험 을 경하여 인가를 득한 외에 의업을 행치 아니할 事, 단 現今간에는 종권(從權)하야 의술 우열을 위생국에서 시험하야 내부대신이 인허상을 급여(給與)할 事." (의사규칙 제2조)라는 표현으로 의사를 규정하고 있는데요. 제1조에서 정의하고 있는 의사는 오늘날의 한의사이며, 제2조에서 정의하고 있는 의사는 오늘날의 의사입니다. 둘을 대등하게 인식하여, 이를 활용하려 했던 것이 대한제국 정부의 서양의학과 한의학을 바라보는 입장이었던 것이죠.

대한제국 정부가 운영했던 광제원에서 행해졌던 의료행위를 살펴보는 것 역시 이런 정부의 통합적 운영에 대한 관점을 확실하게 해줍니다. 광제원에는 한의사들만 있었는데요. 의사규칙의 제 2조에서 말하고 있는 의과대학과 약학과가 당시 대한제국엔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의사만 있었다고 해서 한약만 사용된 것은 아닙니다. 광제원은 한약소와 양약소를 이원화하여 한약소에 한의사 4명, 양약소에 한의사 3명을 배치하여 한약과 양약을 모두 처방하였습니다. 구체적인 통계자료를 살펴볼까요? 광제원에서는 1899년 6월부터 12월까지 총 8197명의 환자를 진료하였는데, 이중 양약을 투여받은 환자는 4755명으로 한약을 처방받은 3436명보다 많았습니다(서양의학 전공자가 없었기에 한의사가 서양의학을 학습하고 동시에 활용한 것이죠). 양약을 더 많이 사용한 것은 당시 한의사들이 서양의학에 매료되어서는 아니고, 당시에도 양약보다 한약이 더 비쌌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1906년에 작성된 [광제원 확장 경상비]에 따르면 한약구매비용에는 396원의 예산이, 양약구매비용에는 306원의 예산이 책정되었는데요. 소개된 두 통계자료의 시점이 다르긴 하지만 양약이 더 많이 처방된 경향이 꾸준히 이어졌던 점을 감안하면 한약이 더 비쌌다는 것을 이해하기엔 충분합니다.

정리하자면 대한제국 정부는 한의학과 서양의학을 대등한 존재로 인식하여 두 의학을 전공한 의료인을 모두 의사로 규정하였고, 당시 한의사들은 필요하다면 양약 역시 처방하고 있었습니다. 현재 대한민국의 의료이원화 정책보다는 중국의 중의/서의를 운용하는 정책과 상당히 유사하지 않나요? 역사에 만약은 존재할 수 없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지 않았다면 중국의 중의사처럼 한국의 한의사도 상황에 따라 의료기기를 사용하는 등 두 의학 전공자들은 힘을 합쳐서 의학발전에 힘을 쏟고 있지는 않았을까요? 한의학이 일제의 잔재가 아니라 한의사에 대한 여러 제약들이 일제의 잔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일제는 경술국치 이후 3년이 지난 1913년 11월 15일에 의사규칙, 치과의사규칙, 그리고 의생규칙을 별도로 반포하여 한의사들을 의생(醫生)으로 격하시켜 시골에서만 활동하게 하는 등 여러 제한을 걸었습니다. 거기에 해방 직전인 1944년도에 만들어진 조선의료령에서는 의사와 치과의사만을 규정하고 의생에 대한 사항이 아예 존재하지 않아 일제는 오히려 한의학을 말살하려고 했던 것을 알 수 있죠. 광복 이후에 국민의료법(1950년)을 제정하려고 했을 당시에도 조선의료령을 거의 그대로 따라, 한의학/한의사에 대한 규정은 없었습니다. 전국에서 약 11만명이 청원서를 내는 등 전 국민적인 열망이 있었고 거기에 여러 국회의원들의 노력으로 한의사 면허 제도가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이죠. 한의사 제도가 부활한 것은 대한제국 정부의 의지를 계승한 것이지 일제의 잔재가 아닙니다.

-대한제국은 한의학/서양의학 대등하게 인식하여 활용하였음. 한의학은 일제의 잔재가 아님. 오히려 현재의 여러 제약들이 일제의 잔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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