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그나 [469044] · MS 2013 · 쪽지

2014-05-08 12: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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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내생애 최고의 외국인.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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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기차역을 빠져나오는 참인데 얄궂은 봄비가 살금살금 내리기 시작한다.아무래도 반쯤은 늦은 걸음인데,
하늘까지 심통을 부리니 오늘 소개팅도 글렀구나,싶어 애꿎은 궐련이나 한대 빼어무려는데,
어깨너머에서 왠 외국인 하나가 다가와선,시가렛 플리즈,하고 수줍게 말을 건네어 온다.

역관도 없이 단신으로 색목인이랑 말을 섞어보는 것은  근 십년만이다.
간만인데, R발음이 잘되려나 신경이 쓰여 저치들한테나 얻어보슈하고 물리려는데,아니다 어떻게 들어간 OECD
인데,싶어 마음을 고쳐먹곤 영국식으로 근사하게 오카이,하곤 넉넉하게 두어개피 건네주니 연신 땡큐,땡큐다. 
이까짓것,유어 웰컴이다하고 내친 김에 불까지 척 붙여주니 동양의 신사를 본 것마냥 자못 놀란 눈치다.

됐다. 이만하면 나도 일등국민이다.토익 420이 홀몸으로 이만치 해냈으니,국위선양이 따로 없다.
여기까지가 딱 좋다.이이상 나대다간,알량한 밑천만 드러나리라. 이만해도 벽안의 거한이랑 일합은 겨루어 
본 셈이니,훗날 손자놈한테 들려줄 할애비 자랑거리 하나 거저 얻은 셈 치자하고 얼른 다시 샤이한 동양인으로 
돌아가려는데,이런  내 모습이 왠일인지 영 시시한 사내가 된 것만 같아 여간 아쉬운게 아니다.

사내답게 한마디만 더해보자.딱 한마디다, 단단히 오금을 박고서는 신중하게 퀘스천을 골라본다.
그래도 아직은 기브미 더 초콜렛이 대세다 싶다가도,아니다.초면에 초콜렛은 너무 노골적이다.덜 달콤해도
한결  부담 없는 캐러멜이 좀 낫다 싶어,이만 결정을 보려는데 이런 제기,두유 노우 유나킴을 잊엇구나.
한국인은 도버 해협에 빠져도 헬프미보다는 두유 노우 유나킴이 먼저다.
한민족에겐 목숨보다 더 소중한게 하나 있으니 그건 바로 겨레의 물음이다.
내가 두유 노우 하면 너는 아이 노우만 해다오.아이 라이크까진 감히 바라지도 않으니 참으로 소박한 민족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일이 거진 다 된거 같아,공연한 조바심에 마음만 급해져선,한다 한다 하다 드디어
"헤이,포리너"하곤 "두유 노우"하고 이제 막 대망의 유나킴을 하려는데,조건반사도 유분수지.내내 얌전하던 
이놈이 이 순간만 기다렸다는 듯, 별안간
"아이 노우 싸이.아이 노우 김치.아이 노우 유나킴.아이 노우 불고기.아이 러브 독도" 란다.

더 앤써가 따로 없다.두유 노우 한번에 아이 노우가 줄줄이니 톡톡히 이문 남는 장사했다 싶어 파블로프의 개도
안부럽다.그래도 초면에 농이 좀 지나치다 싶어 힐끗 쳐다보니 저도 이러기는 처음인지 수줍게 내 눈치를 살살
살피는게 퍽 귀여운 구석이 있어 화낼 맘은 이내 사라지고 막내동생이나 삼았으면,싶기만 하다.

이역만리 객지에서 현지인에게 잘보이고 싶은게지,그 착한 마음이 예뻐보여 달리 줄건 없고 아직 꽤 두둑한 
담배나마 면목 없어하는 그이 손에 곽채로 쥐어준다.
기왕지사 외국인으로  살 팔자라면 차제에 프로외국인으로 한 인생 살다가는 것도 괜찮은 삶이리라.
저정도 기량이면 염천교에서 노숙한들 삼시세끼는 문제없겠다 싶은 것이 무엇보다 다행이다하는 생각부터 드니 
이것도 인연인가 싶어 괜히 객쩍은 웃음만 하릴 없이 우리를 맴도는데,

봄은 어느새,거리 곳곳에 걸려있다.
봄이랍시고 퍽 제멋대로인 봄비녀석도 이만하면 인사치레는 했다 싶은지 슬슬 물러가는 눈치다.
나도 이제 그만 잠시 미뤄논 일상속으로 돌아가야 할테지.그래도 가는 걸음내내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는것은 
비단 향긋한 봄내음 탓만은 아닐 것이다.이 나이에 봄앓이 하는것이 영 쑥쓰러워,언제는 봄이, 인사하고 왔다던가,
미운 말이나 해보지만 그래도 봄은 언제나 봄이다. 
오래전 떠나셨던 봄님이 이제서야 문득, 내게 다시 찾아오시려나 보다.
몹시도 봄다웁게 내게로 오신 봄, 그 봄. 그 날의 나의 첫 봄.

회화가 약한 탓에 그에게 미처 전해주지 못한 말을 지금 이 자리에 민병철을 빌어 남겨본다.
"헤이,빌리, 잇츠 미. 유아 더 베스트 포리너 인 마이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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