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글돌이 [381817] · MS 2011 · 쪽지

2012-06-07 16:5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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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생애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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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과 이어지는 내용이니 안읽으신분은 이글을 읽기전에 먼저 1편을 읽어보는걸 추천합니다.


4.3제주민주항쟁


1948년 4월에 어떻게 하필 제주도에서 그토록 거대한 민중항쟁(보통 "민란"으로 불렀다)이 일어났는가에 관해서는 많은 사람이 의아심을 품을 것이다.
제주도는 지금은 관광의 섬이라서 이념투쟁과는 무관하게 보인다. 그리고 아무리 상식적으로 거슬러 올라가 생각해봐도
섬이란 문화적으로 낙후지역일 텐데 어떻게 그토록 선진적인 민중항쟁의 봉화가 타오를수 있었는가 하는것에 의문을 던질 것이다.
그러나 우선 제주도는 지정학적으로 고립되어 있었던 덕분에 미군정의 지배가 직접적이질 못했고
인민위원회가 상대적으로 뿌리를 깊게박아 1948년까지 섬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들 수 있으나,
무엇보다도 일제시대를 통하여 선진적인 문물의 전위에 서있었던 제주도의 문화적 특성에 우리는 새롭게 눈을 떠야 한다.
제주도는 일제강점기를 통해 일본 본토문명과 매우 긴밀한 연락관계를 유지했으며 상당수의 노동자들이 일본으로 이주하여 재일교포사회를 형성했다.
이들은 일본의 탄광이나 공장에서 근로하면서 일본의 노동운동이나 사회주의운동에 접했으며 역으로 이들의 왕래는 제주도를 급격하게 선진화시켰다.
일제시대를 통하여 농민들의 자립도가 비교적 높았으며, 분화된 직업구조가 본토의 문화와는 다른 양상을 띠고 있었으며
적색농민조합의 조기형성은 해방후 인민위원회의 성장에 이상적 환경을 제공했다.
그리고 해방 이후 급격하게 일본으로부터 25% 이상의 인구가 유입되었으며 이들은 이미 일본의 선진문명을 경험한 사람들이었다.
본토에 비해 결코 낮은 문화수준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제주도의 인민위원회를 뿌리뽑기위해 전후 아시아에서 가장 잔인하고, 지속적이며, 철저한 소탕작전이 감행되었던 것이다.


서북청년단의 만행


그것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것은 서북청년단의 학살만행이었다. 서북청년단이란 김일성이 친일파를 숙청하고 토지개혁을 단행하는 과정에서
견딜수 없는 자들이 월남하여 결성한 북한청년 반공단체인데, 북한에서 공산당에게 땅 빼앗기고 집 빼앗기고, 권세와 돈을 다 빼앗긴 그들은 월남하여 열렬한 반공행각을 벌였던 것이다.
서북청년단은 제주도에 투입되자마자 무자비한 백색테러를 자행하였다.
이 이유없는 양민학살에 대항하여 제주도 인민들은 6년 6개월에 걸친 끈질긴 항쟁을 계속했다.
이 과정에서 6만 명의 제주도 인민들이 학살되었고 약 4만 명이나 되는 인원들이 일본으로 망명하여 오늘의 재일교포사회의 한 축을 이루었던 것이다.


여수순천 항명사건


그런데 여순항명사건이란 바로 제주도민중항쟁을 진압하기 위하여 출동하라는 명령을 거부한 여수주둔 14연대의 반란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사건으로도 약 1만명의 양민희생자가 났고, 여수읍의 절반이 소실되었고 인근 지역의 수백개의 마을이 재만 남기고 사라졌다.
반란군과 토벌군이 번갈아 가면서 벌인 피비린내나는 살상극은 차마 인정으로 묘사하기 어려운 참극이다.
1946년 미군정은 국방경비대를 발족시키면서 전국에 9개연대를 만들었는데 1948년 정부가 수립되면서 총 15개 연대로 확대되었다.
이 과정에서 여수에 14연대가 주둔하게 되었다. 14연대는 광주의 4연대에서 차출된 병력을 근간으로 창설되었으나, 배속된 인원이 턱없이 모자라 현지에서 약 2천명의 병력을 보충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14연대의 창설요원에는 지창수 상사를 비롯한 다수의 좌익계 하사관들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들은 현지 모병과정에서 좌익성향의 청년들을 대거 입대시켰던 것이다.
물론 이것은 남로당 지도부의 군부 내 좌익세력침투공작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군대와 경찰사이의 갈등은 일촉즉발의 악화일로를 치닫고 있었으며,
신망이 높았던 14연대장 오동기 소령이 "혁명의용군사건" 으로 체포되었고, 1948년 10월 19일 오후 6시를 기해 제주도에 1개 대대를 파견하라는 출동명령이 하달되자,
좌익세력의 텃밭이었던 14연대는 "동족상잔이냐, 항명이냐?" 하는 양자택일의 기로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들은 항명을 선택했다

이 14연대의 반란은 우발적인 충동으로 1주일 가량 계속된 격렬한 태풍이었지만, 이로 인하여 남한의 군대 내에 엄청난 공산당조직이 침투되어 있다는 사실이
청천백일 하에 드러나게 되었고 이것은 신생공화국의 근간을 위협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 사실을 자신의 지배에 저항하는 모든 세력을 탄압하는데 악랄하게 활용했다.
여순항명사건의 비극은 보도연맹의 비극에까지 연속되었던 것이다.
여순항명사건은 대책없는 충동적 반란은 더 큰 탄압을 불러일으키고 조직의 와해를 가져온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던져준다.
여순 항명사건으로 국군내에 거대한 숙군의 회오리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박정희의 체포


박정희 소령은 전남 광주의 여순항명토벌사령부로 갔다가 육군사관학교로 돌아왔는데 며칠 되지않아,
1948년 11워 11일 남로당 가입 등의 죄목으로 군 수사당국에 체포되었다.
박정희는 사실 그 순간 죽음이 예정되어 있었다. 수사과정에서 그는 고문도 심하게 당했다.
그런데 당시 중형을 선고받은 군인 가운데 구명된 케이스는 박정희 오직 한사람밖에 없었다.
어찌 된 일인가?


백선엽 육본 정보국장


그의 구명운동에 앞장선 사람은 당시 그를 구할수있는 최고의 요직에 있었던 백선엽 육본 정보국장이었다.
중령 백선엽은 박정희보다 나이가 세살 아래였지만 만군의 선배였고 현재도 상관이었다.
박정희는 백선엽에게 목술을 구걸했다. 그 대가로 군조직 내 좌익세포들의 상세한 명단을 제공했다.
박정희의 자술서로 우리나라 군부 내의 유능한 인물들이 수도 없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만 했다.
같은 조직의 동료들의 죽음의 대가로 그는 목숨을 건졌던 것이다.

박정희의 구명의 근거로서 우리가 말할수있는것은 우선 그가 남로당 조직도표상으로는 상당히 중요한 자리에 있었지만 활동한 흔적이 없었고,
그의 경력이 공산주의자는 될수 없었던 인물이라는것, 그리고 당시에 군부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온 하우스만 대위를 비롯한 미 고문관들이 무리한 숙군이
양질의 장교들을 너무 터무니없이 거세하게 될것이라는 우려를 표명하고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박정희라는 인간의 인격의 무게가 당시 군부내의 많은 고위층들에게 동정을 불러일으켰다는 사실 등을 들수 있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사실은 박정희의 배신과 변절과 전향이었다
그는 오직 살아남기 위해서 삶의 원칙을 바꾸어가는 지혜를 터득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온갖 모순과 아이러니로 얽혀버린 한국의 20세기를 생존해가는 한 인간의 가장 평범한 전략이었을지도 모른다.
박정희는 그렇게 평범한만큼 비범했다.


6.25가 박정희를 살렸다


박정희는 1948년 12월말 서대문형무소에서 나왔다. 죽음의 문턱에서 구사일생으로목숨을 건진 박정희는 백선엽 육본 정보국장의 배려로 육군 정보국에서 무급 문관으로 군무했다.
그러다가 그는 6.25전쟁이 터지기 직전에 육군본부에 복직탄원서를 냈다.
박정희를 또다시 위대한 군인으로 탄생시킨것은 다름아닌 김일성이었다.
6.25전쟁으로 박정희는 공산당전력의 과거를 털어버리고 또다시 승승장구의 가도를 걸을수 있었던 것이다.
전쟁이 발발하자 우리 국군 내에는 인력이 태부족이었다. 박정희와 같이 상황판단능력과 지휘능력을 갖춘 무게있는 인물이 흔치 않았다.
그래서 다급한 상황에서 그는 상관들의 총애를 받았다. 그는 6.25직후에 곧 소령계급장을 다시 달았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직전의 날에는 중령으로 진급했고 10월 25일에는 신설된 제 9사단의 참모장이 되었다.
1951년 4월에는 대령으로 승진했고,1953년 11월 25일 준장으로 진급했다. 36세에 스타계급장을 단 것이다.
1954년 1월 박정희 준장은 대구에서 미국행 비행기를 탄다. 그리고 1955년 7월 1일 그는 제 5사단 사단장이 되었다.
박정희는 비로소 전투부대의 지휘관이 된 것이다.


그레고리 핸더슨 보고서


박정희가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미국의 정보기관에서는 일단 그것을 좌익정권의 등장으로 파악했다.
1960년대 미대사관의 정보기능을 담당했던 한국학 학자이며 대사관직원이었던 그레고리 핸더슨이 1963년초에 작성한 보고서가 그 일단을 잘 반영한다: "1961년 5월 16일 군사쿠데타가 발생했을 때, 그것이 공산주의에 고무되어 발생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은 즉각적인 우려를 유발시켰다.
그러나 한국정부가 반공주의적인 자세와 정책을 취함으로써 이런 우려는 어느정도 해소되었고 미국은 한국정부의 반공주의적 성격을 믿게되었다. 그러나 지난 15개월동안 처음의 우려는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으며, 이런 우려는 한국과 관련있는 미국관리와 한국에 정통한 관측통 사이에 점점 심해져가고있다."


5.16 쿠데타에 대한 김일성의 시각


한편 북한에서는 남한 군사쿠데타를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물론 미국측의 분석보다도 더 적극적으로 더 긍정적으로 사태를 이해했을 것이다.
좌익혁명세력으 ㅣ주도적 인물이었던 박상희의 동생, 그리고 본인은 군조직 내에 남로당 세포였던 바로 그 인물 박정희가 쿠데타에 성공하다니 !
"드디어 올것이 왔다!" 고 그 유명한 한마디를 외친것은 장면에게 밀려 권세의 한문에서 세태를 빈축하고 있었던 윤보선만은 아니었다.
바로 김일성의 입에서도 같은 함성이 울려펴졌다는 것은 쉽게 추측해볼수있다. 김일성은 정치위원회를 소집했고 박정희의 연고자를 즉각 수소문했다.
박상희의 가장 절친했던 친구 황태성이 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황태성은 해방 전 연희전문 2년을 중퇴, 공산주의 운동을 하다가 해방후 조선공산당(남로당) 경북도당 조직부장으로서
대구지방에서 활동하던 자로서 당시 대구 남로당 간부이던 박상희와 절친한 사이였다.
박정희는 어려서부터 황태성을 잘 알고있었다. 전기작가인 조갑제는 재일거류민단장을 역임한 그들의 친구 조영주의 증언을 다음과같이 기록해놓고 있다:
"방학때 고향에 오면 친구인 박상희나 황태성과 자주 어울려 사상문제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는 주로 내가 이야기를 많이 하는 입장이었다.
황태성과 박상희는 전혀 개성이 달랐다. 박상희는 정열적이고 의분심이 강하고 민족주의적이었던 데 비해 황태성은 냉철하고 코스모폴리탄적이었다.
황태성은 골수 사회주의자가 될수 있는 사람이지만 박상희는 그렇게 되기엔 너무 순진하고 뜨거운 사람이었다."


황태성사건


황태성은 10월대구민중항쟁에서 박정희의 형 박상희, 이재복 등과 함께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박상희가 피살되고 대구민중항쟁이 진압되자 도주하여 남로당의 거물 박헌영의 측근으로서 지하에 잠복하여 활동을 벌인다.
그러다가 1947년 10월 박헌영과 같이 월북하여 북한정권의 무역성차관에까지 승진하였다.
한국전쟁의 책임을 물어 박헌영일파가 숙청될때 황태성 역시 무역성차관에서 해임당하여 근근이 연명해오던 차였다.
김일성은 이러한 황태성을 소환, 박정희가 일으킨 혁명의 동기와 박정희의 통일에 대한 견해 및 남북정권간의 비밀협상에 대한 가능성을 아라보기 위하여
남한에 평화통일을 제안하는 비밀협상대표를 파견할 것을 지시한다.
그러나 북측에서 본다면 박정희 접촉의 성공여부가 불투명했기 때문에 보내더라도 절대 다치지 않을 인물을 선발해야 했다.
이에 황태성이 자진해서 가보겠다고 나섰다. 황태성은 최소한 자기는 다치지 않고 다시 귀환할수있으리라고 믿었다.
그때만 해도 북한에서는 쿠데타 주체세력을 민족성향이 강한 인물들로 평가했고 "뭔가 대화가 될수있다"는 희망적인 분위기에 젖어있었던 것이다. 황태성은 임진강을 건너 1961년 9월 1일 서울에 잠입하는데 성공한다.


근현대사 속의 박정희


그 뒤는 어떻게 되었을까? 사실 우리 조선의 20세기 역사는 소설가의 여하한 상상력도 그 다큐멘터리적 현실의 얽힌 타래를 쫓아갈 수가 없다.
그만큼 인간의 모든 이념과 상상력과 욕망과 권력과 비애의 모든 가능태가 현실적으로 구현된 역사였다.
단지 우리가 너무도 우리자신의 역사에 관해 무지하다는 사실만 나는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근현대사에 관해서는 체계적 인식이 거부되었고 사실의 기술이 금기시되었고 이념에 대한 공정한 판단이 유보되었다.
그리고 모든것이 은폐되었고 왜곡되었다. 그 가장 큰이유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걸리기 때문이었다.
박정희 시대에 근현대사에 관한 연구가 철저히 통제되고 박해를 받았던 이유는 20세기 어느 곳을 들여다 봐도 대통령 박정희의 이야기가 안걸릴곳이 없기때문이었다.
대통령 박정희는 자신의 인생역정을 공개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차라리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그런데 과연 우리가 박정희의 무덤에까지 침을 뱉어줄 필요가 있을까?
그리고 과연 박정희는 침뱉음을 당하는 것으로 면죄부를 얻을 수 있을까?
그의 인간적 충정과 고뇌를 이해 못하는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박정희 무덤에 침 한방울도 흘려서는 안된다. 그것은 단절되어야 하는 역사의 한 장일 뿐이다.

박상희의 딸 박영옥은 바로 육사8기생으로 박정희와 함께 5.16을 주도한 김종필의 부인이었다.
황태성은 친구 박상희의 부인, 그러니까 김종필의 장모 조여인을 접촉했다.
조여인의 반가움과 공포로 뒤섞인 얼굴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 뒤의 이야기는 독자들의 상상력에 맡긴다.
자세한 내막은 아직도 생존하고 있는 김종필 본인에게 물어보아야 할것이다.
내가 대학 다닐시절에만 해도 김종필과 황태성이 같이 공화당을 조직했으며 황태성이 공화당 비밀요원의 밀봉교육을 담당했다는 등의 이야기는 대학생 써클실에서 흔히 떠도는 풍설이었다.
1963년 대선 때도 황태성 사건은 유세이슈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우리 민중은 그러한 이슈에 크게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박정희,김종필이 황태성을 직접 만나 무엇을 획책했는지, 정말 그런 일이 있었는지 없었는지의 여부는 나로서는 확언할 길은 없다.
그러나 인간 박정희는 평생을 존경하던 형 박상희의 절친한 친구며 어렸을때 그에게 세배도 하곤 했다는 황태성을 일정하게 예우했음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황태성은 결국 1963년 12월 14일 토요일 오전 11시 20분, 인천근교의 한 육군부대 안에서 총살형이 집행됨으로써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였던 박정희는 그에게 내밀어진 사형집행 승인서류에 싸인하기를 주저했다: "아까운 사람인데 꼭 싸인해야 하나?"

박정희가 황태성을 죽인 것은 곧, 자신의 형 박상희를 죽인 것이다. 자신의 형 박상희를 죽인 것은 곧 자신의 과거를 죽인 것이다.
자신의 과거를 죽였다는 것은, 이경우 북한과의 모든인연을 단호히 단절하겠다는 것을 표명한 것이다.
이러한 의지표명만이 제3공화국 대통령으로서 인간 박정희가 생존해나갈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결국 황태성은 미국이 죽인 것이다.
황태성간첩사건을 미 수사당국은 집요하게 추구했고 결국 그 신병을 2주동안 넘겨받아 필요한 모든 취조를 다 했다.
박정희에게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남한 정치사의 출발은 애초부터 민중의 지지기반이 없었고 자신의 주체적인 사상기반이 없었으며, 한국의 내재적 사정에 무지스럽고 냉전체제만을 추구하는 미국의 전략기반으로서 그 일차적 생명력을 유지했기 때문에,
이승만 정권은 끊임없는 전복의 위험에 직면했고, 사회는 무능과 부패와 혼란의 도가니로 빠져만 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광범위하고 강력한 권력지휘계통을 소지한 군체제가 모반을 도모한다는 것은 그렇게 기이한 일은 아니었다.
그것은 사실 고려말 이성계의 쿠데타 성공이래 우리나라 역사에 줄곧 내재하는 가능성이었다.


숙군과 정군


중일전쟁이 마오쩌둥에게 세력진장의 절호의 기회를 주었다면 한국전쟁이 인간 박정희에게 재기의 찬스를 주었다는 것은 앞서 말한 바와같다.
전쟁직후 36세의 나이로 남로당조직원으로서 숙군대상이었던 경력에도 불구하고 별을 달았던 박정희!
그 뒤의 그의 삶은 기묘한 운명에 휘몰릴수밖에 없었다. 숙군대상이었다는 그의 경력이 오히려 어지러운 정치현실과 함께 부패할수밖에 없었던 군조직 내에서 기묘한 무게를 더해갔다.
박정희는 결코 일신의 안일만을 위하여 소아적 편안함만을 구하는 인간은 아니었다.
무엇인가 더 큰 비젼을 위해 노력하는 인간이었고 그만큼 삶의 철저성은 있는 사람이었다.
과묵했고 결단력이 있었으며 주변사람들에게 웅크린 호랑이와도 같은 어떤 카리스마를 발하는 힘이 있었다.
따라서 정군운동을 벌이는 소장파 장교들의 존경을 받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숙군대상경력을 가진 그가 그 조직에서 살아남을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숙군의 대상이 아닌 숙군의 주체가 되는 길밖엔 없었다.
자체이념이나 존재이유를 확보하지 못한 대한민국 국군의 부패상은 극에 달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대한민국 국군은, 기껏해야 동족상잔의 경력밖에는 지니지 못했으며, 창설의 뿌리조차 미군정의 방편일 뿐이었고, 더 캐어 들어가자면 일군,만군의 경력만 화려하게 펼쳐질 뿐이었다.
군대란 한 민족국가의 보위를 위하여 타민족과 영예로운 전쟁을 수행함으로써만 그 존재의 의를 얻는 조직이다.
평화시에 군대가 존속할수 있는 이유도 민족을 위하여 얼마나 영예로운 전쟁을 싸웠냐하는 그 도덕성으로 확보되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국전쟁은 대한민국 국군에게 그러한 존재이유를 부여하기에는 너무도 부도덕한 동족상잔의 비극일 뿐이었다.
따라서 당시 군대가 부패하고 정군운동이 힘을 얻었던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중심에 박정희가 있었다.
그리고 그 도덕성의 바탕에는 그가 숙군대상자였다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이성계가 쿠데타에 성공할수 있었던것은 중원세력의 교체기에 권력공백이 있었다는 사실에 있다.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쿠데타가 성공할수 있는 유일한 길은 미국이라는 권력의 본원지의 향배에 달려있었다.
그런데 4.19라는 학생혁명의 성공을 보고 박정희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미국이 혁명에 의한 정권의 교체를 허용할수밖에 없는 상황이 이땅에 존재한다는 체험은 박정희의 결의를 굳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 결의는 이미 4.19혁명 전에 섰고, 그 실행은 그 1년후에 이루어진 것이다.


4.19와 5.16


박정희의 쿠데타성공의 배후에는 4.19혁명 후 전개된 사회혼란에 대한 국민들의 불안감이 도사리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러한 혼란이 어차피 거쳤어야 되는 창조적 혼란이며 도덕성없는 군인들에 의하여 진압되어야만 했던 성격의것이 아니었다고 확신하지만,
하여튼 일반대중들은 자신들의 불안감을 해소시켜줄 수 있는 강력한 질서의 조속한 도래를 갈망했던 것은 확실했다.
그 불안감의 해소에 관해서는 좌적인 방향과 우적인 방향의 가능성이 혼재해 있었다.
박정희와 그 주변의 사람들에게 쿠데타 초기에는 분명 사회주의적,민족주의적 색채가 있었다.
그러나 황태성사건을 비롯한 혁명후의 여러 상황의 전개는, 대한민국에서 집권자로서 성공할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러한 모든 이상주의적 환상을 거부하고
오직 친미,반공,경제개발에만 전념해야한다는 박정희의 해오를 잘 말해주고 있다.


끊임없는 신념의 배반


박정희는 체질적으로 매우 원칙적인 인간이었다. 그러나 그의 문제는 생존을 위하여 그 원칙을 마구 바꾼다는 데 있다.
성장기에 형 상희에게서 받은 그의 이상주의는 그의 사범학교 시절 감수해야 했던 황국신민교육을 음울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그는 보통학교 교사가 되어 교육자로서 또 새로운 이상주의를 발견했다.
그러나 다시 그 이상주의를 배반하고 그는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가 황국신민으로서 천황폐하를 위하여 사쿠라 꽃잎처럼 떨어져 죽을 각오를 하는 군인이되었다.
그리고는 그 신념을 또 배반하고 조선경비대의 장교가 되었다. 그리고 그 조직에서 새롭게 남로당이라는 이상주의를 발견했다.
그런데 오직 생존을 위하여 그 이상주의를 또 배반한다. 그 쟁쟁한 동료들을 모두 죽음의 구렁텅이로 빠트리는 배신의 자술서를 태연자약하게 써내려 갔던 것이다.
그리고 살아남은 박정희는 자유당치세하의 권력의 부패와 연결된 군대조직 내에서 정군이라는 하극상의 이상주의에 또 가담한다. 그리고 쿠데타를 성공시킨다.
그리고 새로운 이상주의를 펼치지만 결국 그 모든 이상주의적 신념을 거부하고 철저한 리얼리스트로 변모한다.
그의 생애는 끊임없는 변절과 변신의 여로였다. 그 여로의 종착역은 궁정동 안가의 총성이었다: "난 괜찮아!"
이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는 죽음에 직면해서도 조금도 당황치 않았고 죽음의 여신이 자신의 생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찾아온 것을 알았다.

나는 문화일보 기자생활을 하면서 그 현장에서 그의 마지막 소리를 들었던 여가수를 상세하게 인터뷰한 적이 있다.
박정희의 죽어가는 모습은 거의 죽음을 고대하고 있던 자의 모습이었다. 자살에 가까운 죽음이었다.
어느 인간이든지 박정희와 같은 변절과 영욕을 되풀이할수밖에 없는 생애를 산사람이라면 죽음을 멀리하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의 죽음을 미화할 가치는 있었다.
그렇다고 그의 무덤에 침을 뱉을 가치도없다. 이에 대한 판단은 우리민족의 현대사를 이해한 미래의 새싹 여러분들의 몫이다.
최소한 나 도올은 이 책의 독자들이 박정희와 같은 가련한 독재자의 생애를 되풀이하지 않기만을 바랄뿐이다.


전두환과 박정희


박정희의 생애의 최후 일단이 우리의 논술이라는 주제에서 가장 크게 문제되는 부분은 그 삶의 폭력성이다.
우적인 전향이 오직 이땅의 경제도약을 위한 몸부림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면 다행일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경제발전이 그의 유신치세기간의 모든 폭력성을 정당화할 길은 없다.
왜 그토록 처절하게 야당지도자들이나 시인,사상가,민중지도자들을 탄압했으며, 재벌이라고 하는 거대공룡들의 횡포를 조장했으며,
동백림사건,인혁당사건과 같은 양심적 지식인을 사지로 몰아넣는 끔찍한 조작사건을 계속 일으켜야 했는가?
그것은 대의를 위한 전향이 아니라, 절대권력의 무의미한 존속을 위한 타성적 발악에 불과했다.
일말의 대화나 타협이나 양보나 합리적 소통이 없이 자신의 권세의 유지를 위하여 그 권세에 도전하는 모든 인간들을 학대하고 학살하는 프로크루스테스(Procrustes)의 침대에 불과했다.
우리나라의 법질서도 박정희라는 절대권력에 무조건 복종하는 하수인들의 코스메틱에 불과했다.
그 시대를 살아간 법관들에게, 극소수의 야심적 법조인을 제외하고는, 우리는 하등의 존경의 염을 표할 수 없다.
이러한 절대권력의 만행은 그의 사후에더욱 극렬하게 우리사회에 노출되었다. 
1980년 5.18광주민중항쟁에서 금남로에 뿌려진 선혈로 상징되는 수천수만 선남선녀들의 희생이 그것이다.

친구의 가슴에 총을 겨눈 인간 김재규의 개인적 용단에 우리는 경의를 표할 수는 있지만 결코 그를 역사의 영웅으로서, 열사로서 추앙하기는 어렵다.
우선 그의 행위는 뚜렷한 대책이나 대안이 없었다. 그는 사실 박정희의 자살 동반자에 불과한 인물이었다.
박정희의 사후 벌어진 우리나라의 정치계 동향이란 그야말로 맹목적 권력에 눈이 먼 군부패자 승냥이들의 싸움이었다.
그싸움의 희생자가 또다시 "서울의 봄"을 맞이한 민중이 되어야 했고, 그 민중의 지역적 샘플로서 광주인민들이 선택되었다고 하는 이 비극적사실은 20세기 우리역사의 폭력성을 강력하게 간증하는 것이다.
그것은 전남지역에 집중산재하는 고인돌의 역사로부터 마한,백제,고려의 수난의 역사를 거쳐, 정여립 모반사건의 처리과정, 임진왜란때의 호남수군과 의병민중의 항쟁,
동학혁명전쟁, 구한말호남의병, 광주학생독립운동, 여순한명사건, 박정희의 영호남유리정책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되풀이된,
우리역사의 구조적 모순의 분출구로서 악용되어온 연속성의 한 고리로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러나 5.18 광주민중항쟁은 그 기나긴 폭력의 역사에서도 가장 잔인하고 가장 악랄하며 가장 의도적이고 가장 조직적인 사건이었다.
그 폭력의 주제는 소위 박정희의 정군운동의 맥을 잇는다고 자부하는 신군부였으며, 신군부의 대표주자는 전두환이었다.
전두환은 "박정희의 아들" 임을 자처했다. 다시 말해서 박정희라는 역사적 개인의 모든 가치관의 역사적 화신이었던 것이다.
그가 박정희에게서 배운 것은 이 나라의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바로 다스리고자 하는 민중들을 총검으로 무자비하게 찔러 죽이고 겁을 주어 다스려야 한다는 가치관이었다.
전두환은 그 교훈을 매우 충실하게 실천했다. 5월 18일 제7공수여단 33,35대대의 행동은 시위진압이 아니라 전혀 평화로운 일상적 시민들을 상대로 한 학살극이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과정은 길어서 생략)


산 자들아! 모여서 함께 나가자!


이제 나는 한국현대사의 강의를 끝내려 한다. 지금 안온한 환경에서 차분하게 이책을 읽고 있는 이땅의 젊은이들은 알아야 한다. 무엇을?
바로 여러분들의 안온한 환경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피땅,피멍으로 이룩한 공든탑인가 하는 것을!
내가 고려대학에서 철학교수로서 강의를 하고 있던 80년대에만 하더라도 학생들은 교정에서 다음와 같은 노래를 목터지게 부르며 숨어있던 짭새들의 곤봉에 피가 터지곤 했던 장면은 학원의 다반사였다.

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 피
두부처럼 잘리워진 어여쁜 너의 젖가슴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왜 찔렀지 왜 쏘았지 트럭에 싣고 어딜 갔지
망월동에 부릅뜬 눈 수천의 핏발 서려있네

산 자들아 산 자들아 모여서 함께 나가자
욕된 역사 고통 없이 어찌 보듬고 나가랴
피! 피! 피!

생각해보라! 지금 아무 생각없이 학교 교문을 나선 그대 어여쁜 여학생의 젖가슴을 살기로 시뻘겋게 달아오른 공수부대 대원이
M16에 꽂은 총검으로 두부 자르듯 도려내고 있는 장면을 한번 생각해보라!
이것은 노래 가사가 아니라 광주시민들 모두가 눈으로 가슴으로 목도한 현실이었다.
이것이 소위 내가 말하는 20세기 우리역사에 내재하는 폭력의 문제였다.


인간의 기본적 권리


그것이 바로 4반세기 전의 우리 현실이었고, 1980년대 민주항쟁이란 바로 이러한 폭력에 멍든 가슴들의 자유를 향한 몸부림이었다.
이땅, 이 나라, 이 국민을 다스리겠다고 하는사람들이 그토록 국민을 찌르고 죽이고 겁주어야 할 이유가 대체 어디에 있는가?
전두환 군부독재의 행동을 과연 무엇으로 정당화할 수 있겠는가? 인권이란 무엇인가?
인권에 대하여 우리는 복잡한 철학적 논의를 할 필요가없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인권)는 생존권이다.
생존권이란 이해하기 아주 쉬운 것이다. 그냥 멀쩡한 몸으로 길거리를 걸어갈 수 있는자유, 내 몸에 부당하게 상처가 안날 수 있는자유,
남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내에서 내 스타일대로 살 수 있는 자유, 뭐 이런 것이다.

그런데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우리 사회는 여러분들이 그냥 길거리를 활보할수 있는 자유조차도 없었다.
이유없이 심문당하고, 이유없이 구타당하고, 이유없이 총칼에 찔려도 한마디도 항의할수 없었던 그런 사회였다.
이 내말을 과장이라고 말할수 있는 자에게야말로 우리는 마음놓고 침을 뱉어야 한다.


폭력과 논술


이렇게 폭력과 난무하는 상황에서 과연 논술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폭력에는 오직 저항만 있을 뿐이며, 행동과 실천이 있을 뿐이다.
내가 80년대에 대한민국에서 논술을 가르쳐야 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하겠다: "학생들이여! 붓을 놓고 거리로 뛰어나가라! 그리고 싸우라!" 
과연 그런 상황에서 "합리적 소통" 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러나 이렇게 합리적 소통을 거부하고 논리적 사고를 부정하고 논술적 의사개진을 오히려 수치스럽게 느꼈던 7~80년대 우리나라의 지적 흐름은 오늘날 2000년대 우리 사회에까지 많은 부작용을 낳고 있는 것이다.


출처 : 논술과 철학강의 (저자 도올 김용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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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댓글돌이 · 381817 · 12/06/07 16:59 · MS 2011

    힘들다;; 다읽으셨으면 좋아요 한번씩만 눌러주세요 ㅜㅜ

  • AbandonedSoul · 59684 · 12/06/07 17:47 · MS 2004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잘 읽었습니다.

  • 문짝 · 246718 · 12/06/07 18:48 · MS 2008

    박정희의 삶을 읽고 있으니

    인간미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소시오패스가 느껴지네요

    생존을 위해 행했다는 자신의 친구, 자신의 신념에 대한 배반의 연속

    정말 동물적이고 본능에 충실한, 한 마리 바퀴벌레와 같은 삶을 살았네요

  • Keny · 275210 · 12/06/07 19:16 · MS 2009

    박정희가 쿠테타로 장기집권 안했다면 분명 정치인들에 의해 대한민국이 좌지우지 했을거라 생각하는데
    상상만 해도 그저 한숨만 나옴..민주주의와 정치의 성숙은 피와 역사의 고통속에 성숙되는 것이라 봅니다

  • 감자보이 · 406286 · 12/06/07 19:55
    회원에 의해 삭제된 댓글입니다.
  • 핏빛진리 · 386969 · 12/06/07 20:39

    맞는말이긴 해요. 하지만 박정희가 암살당해서 문제. 전두환같은 찌꺼기들이 남았으니까요

    지금 선진국화된 민주국가들 보면 다 시민들로부터의 계몽의식으로 비롯되어 나온 혁명이었죠. 프랑스도 지금과 같은 권리국가를 이루는데 엄청난 사람이 희생되었잖아요.
    우리도 많은 피와 희생이 없었다면 지금의 우리나라는 없었다고 생각하는데
    그렇다고 박정희가 추앙되고 본받아야할 사람은 아니다고 보는데 요즘 또 그런사람들이 많이들 보이는듯..
    박정희 대신에 레닌같은 지도자가 대신하였다면 우리나라는 훨씬더 발전된 방향으로 나아갔을 수도 있죠.
    제말의 뜻은 우리나라같이 고전 왕습체제의 조선에서 그대로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여 시민들로부터 희생없이 바로 왕권이 붕괴된 나라에서 피의 희생없이 그대로 정권을 물려받았다면 더 끔찍했을 거라고 보는 입장이에요. 영국 프랑스 소련 중국 방향은 다르더라도 모두 시민들의 계몽했었기에 왕조타파가 가능했었고 지금과같은 강대국을 이룰 수 있었죠. 옆집 북한만 해도 그대로 조선의 왕권을 물려받아 김씨왕조가 사회주의의 탈을 쓰고 왕권을 유지하고 있고 시민들도 수용만하니 나라가 망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인거죠.
    저는 독재가 필연적일 수 밖에없는 과거 한국의 현실을 이해해야하지 않냐는 생각이에요

  • 펭귄맛 · 389525 · 12/06/07 21:32 · MS 2011

    1. 민주주의 학습이 반드시 피를 봐야 성숙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피보는 투쟁이 아닌 국민교육에 의한 학습과 민주적 정치참여의 경험이 더 나은 효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2. 함부로 레닌을 끌어오시는 건 위험하다고 봅니다. 그는 어디까지나 혁명적 사회주의자이자 독재자였으니까요.


    북쪽의 김씨왕조는 조선의 왕조를 물려받았다 말하기 어렵고, 소련과 중국이 강대국인 건 사실이지만 민주주의는 똥망이지요.

    님이 말씀하시는 게 전형적인 386식 인식인데, 386들의 민주주의 수준이 그리 높다고는 말할 수 없지요. ㄱ-;

    그리고 님은 '왕의 목을 친 역사'가 있어야 민주주의가 성숙하기 때문에, 그 '왕' 역을 할 독재자가 필요했다는 식으로 말씀하시는데,

    정작 박정희는 국민 혹은 민중에 의해 목이 날아가지도 않았고, 386들은 지금도 왕의 목을 친 역사가 없다고 한탄합니다.


    결정적으로 영국 같은 경우는 '왕의 목을 친 역사'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민주주의 후진국이라는 평가는 듣지 않습니다.

    (아, 생각해보니 있긴 있군요. ㄱ-)

  • 펭귄맛 · 389525 · 12/06/07 21:34 · MS 2011

    시끄럽고 복잡한 민주주의가 싫어서 피와 고통을 강요하는 독재를 택한 것을 민주주의와 정치의 성숙을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위험해 보이네요.

    직업적 정치인들이 서로 지지고 볶는 게 민주정치입니다.

    그걸 부정하려 드신다면 흔한 정치혐오에 불과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민주주의의 성숙을 위해 민주주의를 무너뜨린다는 말은 역설적 진실이 아니라 그냥 야바위라고 봅니다.

  • 12중대장 · 389979 · 12/06/08 01:20

    국민이 뽑은 정치인이 의회에서 대한민국을 좌지우지 하는게 민주주의입니다.

  • 물리Ⅱ · 21508 · 12/06/08 17:40 · MS 2003

    박정희가 남로당 배신한건 남한 입장에서 좋은일이네요. 남로당 숙청하지 않고 6.25를 맞았다면 재앙이었겠어요.

  • 물리Ⅱ · 21508 · 12/06/09 21:44 · MS 2003

    모르비로 보면 비추하나네요 워찌 이런일이..
    코멘트 하나 더 해야겠습니다
    박정희는 남로당을 배신함으로써 비로소 남한 시민의 자격을 얻었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