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전취식
게시글 주소: https://iu.orbi.kr/00022018842
제목: 무전취식, 도주해도 무죄?
택시를 타는 이유는 편안해서다. 손잡이를 잡고 서서 갈 필요도, 사람들끼리 불쾌한 체취를 맡아가며 서로 이낑대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묘하게 불편할 때가 있다. 라디오를 크게 틀고 갈 때이다.
보통은 좋게 말한다. "실례지만, 음악소리가 너무 커서 그런데 좀 꺼주시면 안 될까요?"라고 말하면 불쾌하다는 듯 소리를 줄이는 경우가 제법 있다. 투박한 오른손으로 음악을 지휘하는 검은 동그라미를 왼쪽으로 살짝 돌려놓아도, 내 귀는 편안하지 않다. 꺼달라 했는데 줄여놓은 터라 시끄러운 록음악이 공포영화마냥 조용하게 들리니 더 거슬린다. 이 때부터 긴장은 시작된다. 한 번 더 말하면 불쾌해하실 것 같은데 이걸 참으려니 내가 고통스럽다. 어느새부턴가 나는 지하철보다 더 불편하고 긴장된 상태로 택시를 이용하고 있었다.
문제는 동승했을 때다. 실제보다 나이스하게 보일 필요가 있다면 저런 볼륨따위 대범하게 넘어가야 한다. 그래서 친구 더군다나 그 친구의 성별이 여자일 때는 좀 더 침착해야 한다. 아비샤이 마갈릿 교수의 말대로 정의롭기보다 품위있고 싶다.
이런 나조차도 품위를 추구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 바로 음식을 계산할 때다. 예전에 일본에 여행갔다 분명 7만원어치 먹었는데 12만원을 계산하여 분노로 잠을 못 이룬 기억은 나로 하여금 항상 영수증을 확인하게 했다. 어려서부터 암산을 좋아했던 것도 한몫했다. 여러 메뉴와 음료가 쏟아져나오는 고깃집, 술집에서도 항상 계산만은 정확하게 했다.
여러 메뉴를 시키는 고깃집이나 안주 파티인 술집에서 그는 타고난 버릇으로 계산이 원래가격보다 더 되면 바로 지적한다. 그 지적을 들은 점원은 당황하며 쉬이 수긍하고 그는 당당히 가게를 나온다. 문제는, 그 옆에서 지켜보는 이성(소개팅 혹은 애인)도 좋아하냐는 것이다. 돈 1000원 더 나왔다고 이를 지적하여 당당히 1000원을 돌려받는 그 자기권리 실현의 모습이 왜 안멋있어보이는지 의문이나, 딱히 폼은 나지 않는다고 한다.
여하튼 계산시 자동분개모드로 살아보니, 의외로 헛점이 많았다. 어느 집은 막판에 시킨 제로콜라값을 빼먹었고 어느 집은 시키지도 않은 차돌박이 1인분을 더했다. 이 경우 그 자리에서 말하면 문제는 평화롭게 해결된다. 내가 돈을 더 내는 경우에는 남모를 존경을 받는 기분마저 든다.
그런데 그 차액이 소액이면 말하기가 좀 그렇다. 어느 술집의 경우 단돈 200원을 더 받았는데 말하려니 내 옆의 후배가 나를 이상하게 볼 것만 같았고 안 말하려니 내 원칙이 흔들렸다. 아냐 이게 아닌데 왜 난 자꾸 이런 걸 말하려 할까.
이런 경우도 있다. 그러니까, 3만원이 나와야 하는데 가게측 실수로 계산을 2만 5천원만 하게 된 상황. 이 경우 5만원권 지폐를 쓰면 2만 5천원을 돌려받을 것이다. 5천원이 생긴 것이다. 이게 웬 횡재냐 하는 순간 정말로 횡재가 됨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법원은 이를 사기죄라 한다. 이게 왜 사기지? 의문이 드는데 거스름돈 더 받는 걸 알고도 챙기는 순간 상대를 기망했다는 것이 판례의 입장이다. 사기 범죄는 상대를 속여 착오에 빠지게 한 다음 그 착오에 기하여 재물의 교부를 받는 것일진대 왜 이게 사기지?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그렇다면 거스름돈 받을 때는 몰랐는데 집에 가서 지갑을 확인해보니 더 받았음을 알고 챙긴 경우는 어떨까. 이 경우 점유이탈물횡령죄가 된다. 점유이탈물이라 함은 점유자의 의사에 의하지 아니하고 그 점유를 이탈한 물건을 지칭하는 것인데 이 경우 가게 주인이 어찌됐건 준 것 아닌가? 그럼에도 당신은 점유이탈물횡령죄라는 것이 판례의 입장이다.
계속해서 갸우뚱해지는데 목운동이 되니 좋긴 좋다.
마지막으로, 오랜만에 애인과 분위기를 내러 값비싼 식당서 식사를 했는데 그만 지갑을 집에 놓고 와서 도주한 경우는 어떨까? 전술한 사례중 가장 질나쁜 이 케이스를 정작 형법은 처벌하지 않는다. 오직 경범죄처벌법에만 걸릴 뿐이다.
정리하면, 거스름돈을 더 받았는데 받을 당시 알고도 안 돌려주면 사기범, 집에 가서 알았는데 안 돌려주면 횡령범이 되지만 무전취식하고 도주한 경우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형사처벌없이 범칙금 납부로 끝나게 되는 것이다. 거스름돈 받을 당시 원래 받을 금액보다 더 받는 것을 알았다면 신의칙상 고지의무가 있다고 하는데 이를 민사상 채무 발생과는 별도로 형사처벌을 할 필요가 있는지는 의문이다. 무전취식이야말로 먹고 나서 돈이 없으면 신분과 연락처라도 밝혀야 할 신의칙상 의무가 있는 것 아닐까? 법은 절대로 현실을 다 반영하지 않는다. 대부분은 반영하여 만들어졌고 그에 따라 잘 녹아들지만 현실과 법의 간극이 클 경우 법이론은 작위적으로 사실관계에 개입하여 결론을 뒤바꾼다. 이런 사회는 정의롭지도 않지만 품위는 더 없다.
신의칙은 마법의 단어다. 다만 그 마법에 에먼 서민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고즈넉한 법리의 세계로 무작위로 빨려들어가 누군가는 별탈없이 벗어나고 누군가는 사기범이 된다. 이제 이런 기준을 일별할 신의칙상 의무가 발생하게 되었다!
0 XDK (+0)
유익한 글을 읽었다면 작성자에게 XDK를 선물하세요.
-
[속보] 베트남 '권력서열 1위' 응우옌 푸 쫑 공산당 서기장 별세 0
베트남 ‘권력서열 1위’ 응우옌 푸 쫑 공산당 서기장이 19일 별세했다.
-
정지상의 송인이라는 작품입니다. 여기서 "풀빛" 은 색채어 인가요 색채이미지...
-
폰이나 앱으론 안됨?
-
아 너무 힘들다 1
과외생 멍청하면서 노력도 안하는데 뭐 내가 어떻게 해줘야되는거지
-
10000개의 물2 문제를 풀어야 나갈 수 있는 물2 지옥에 가두고 싶다
-
재밌으면 미적 버림
-
썩던콩 0
이미 치코리타 우치하
-
반수생인데 중간2~낮1 왔다갔다해요 적분이 유독 약하고 수특수완에다가 뉴런 문제만...
-
고1때까지는 수학 공부 잘 하다가 고2 돼서 이유는 저도 잘 모르겠으나 이상하게...
-
여행을 마치고. 0
여행을 끝낸 후 앞으로 남은 117일 끝까지 버텨 나가겠습니다. 내년에는 대학...
-
일주일 풀로 쉼 1
네이버 웹툰에 있는거 정주행 ㅈㄴ함 정확히 토요일부터 오늘 금요일까지 일주일 놀았네...
-
미리수 높으면 좋아요
-
강X 1회 96 1
63분 28번 어려웠고 22번 틀림 씨발아
-
ㅈㄱㄴ 건동홍숙 이상 라인 쓰는 애들한테 3합7 3합6 어려움?
-
귀여워 0
https://www.instagram.com/reel/C9j7JcAoD3C/?igs...
-
국어 공부 1
강사분들 n제나 주간지 해야하나요? 지금까지 이비에스랑 기출만 풀었습니다..
-
가서도 안된다~
-
아니 ㄹㅇ 책상 다다닥 붙어있고 무슨 도때기시장 마냥 우글거리면서 시험치는데...
-
노래방에 나옴
-
겸양 인공지능 1
역시 겸양은 맞음 김상훈 강민철 박광일 국어 수학 영어 수능 시대 러셀
-
다들 화내시겠죠? 코시 슈바르츠라던가.... 여튼 이상한 거.... 일단...
-
반수열차 출발까지 일주일
-
주기율표랑 전기음성도만 이온화에너지 이거 말고 외울게 있나..? 물론 필자는...
-
수능끝나고 시간빌게이츠 기간에 불후의명강 한번 들어보는 수밖에 없음 말로 설명하기...
-
시발점 미적 빨리 끝내고 싶어서 몰아보려고 했는데..안좋을까요?
-
자기객관화가 되어야 뭘해야할지 알수잇음 그리고 좀 재밋게? 스트레스덜받으면서?...
-
ㄹㅈㄷ 공하싫 2
ㄹㅇ
-
화1생1했다가 착해졌어요 심지어 6평 전에는 생1화2 하려고 했었는데
-
내가 그들보다 하나를 더 알고 있음.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
-
이거뭐지 12
-
솔직히 과탐>>>>>>>>>사탐 맞는거같음..
-
광고연졔기문이럿게다온나!두개의정답을좋압하옂얻바을선택핟나...
-
작수 기준 공통에서 14,22번급 빼고 다 푸는 게 목푠데 3
드릴 22번수준 넘어가고 수특 수완 N티켓 4규s1 빅포텐s1 문해전s1 이해원s1...
-
지도교수님이 전화달라 하셔서 전화 드렸었는데 엄청 회유하시네여 더 구체적으로 사유를...
-
오늘 방학식 했는데 성적표 나오고 이거 이제 나는 정시밖에 답이없다 싶어서 밥 먹고...
-
다 독해할시간이 없음
-
갳우
-
사탐하고 싶으면 사탐하고 과탐하고 싶으면 과탐하는거지
-
시즌1 전부 풀고 시즌2 풀기 vs 그냥 순서대로 풀기 뭐가 낫다고 보시나요
-
사탐런 패기 메타임? 아니면 사탐런한다고 나대는 새끼들 패기 메타임? 그것도 아니면...
-
[단독] '업무 과중' 호소 30대 초급 경찰 간부 숨진 채 발견 2
'업무 과중'을 호소하던 서울 관악경찰서 소속 30대 경찰 간부가 숨진 채...
-
여기서 어디까지 올리면 재수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저는 중경 이라고 생각해요
-
시즌2 DAY 3개씩... 작년꺼라 빨리 털고 싶네요
-
난이도 ㅆ창 났네…ㅋㅋㅋㅋ
-
오분후식 0
1945~ 2100마무리짓자
-
과외할때이게제일재앙임 제발모르겟으면 모르겟다고 하라고... 다음단원넘어갓는데 사실...
-
현직 초등교사임. 초딩들이 노력 차이가 나면 얼마나 나겠음. 근데 한놈은 이해력...
첫번째 댓글의 주인공이 되어보세요.